2017.3.3 국립중앙박물관
2017.3.3 국립중앙박물관
고구려 벽화의 느낌이 관음보살, 고려시대의 관음보살을 보면서 느꼈던 느낌과 동일한 게 아닐까?
고구려가 표현하려 했던 정신세계?
삼한은 이미 철기를 사용하던 문화권이란 것인가? 고조선과 부여, 삼한이 연관되어 있다는 무엇이 보이는가?
석기시대 말에 이미 정교하게 갈아서 깎인 돌과 나무를 보면서 고도로 확립된 인텔리전스를 느낄 수 있다. 청동기부터를 본격적인 인텔리전스의 발현이라고 보는 관점에 연속적인 감각이 필요하다.
낙랑의 무덤에서 나왔다는 출토물의 정교함은 마한, 변한, 진한의 철기, 화살촉과는 비교가 안된다. 투박한 수준이다. 브론즈가 확연히 사용된 고조선의 유물들, 브론즈는 아이런보다 상당한 고급품인 것이다. 기술발달의 이전단계로 철기보다 수준낮다는 식으로 바라보는 관점에 보조적인 시점이 필요하다. 청동기시대란 어디까지나 소수정예의 세상이었던 것으로써, 대중사회가 필요한 국가의 모습이라곤 할 수 없을 듯 하다.
고구려를 보면서 동쪽의 청룡이 되었던 북의 거북이가 되었던, 새의 얼굴이 신성스럽게 표현된 주작이 되었던, 서쪽의 백호가 되었던 모두 몸뚱이는 뱀의 몸뚱이로써 낙랑의 유물에서 보이는 중화문화가 황제의 상징으로 인식하던 룡의 모습이 있는게 아닐까?
마한, 변한, 진한의 철기들과 토기들은 구분이 될 수 있는 걸까?
고구려 정신세계는 낙랑유물에 남겨져 있는 룡과 관련이 없는 걸까?
청동기를 철기와 연계시킬 수 있는가? 브론즈 사용집단은 아이런을 활용한 사회집단과 연계성을 가질 수 있는가? 고조선의 청동기는 요령식과 한국식으로 그 모양에서 칼의 모양새가 뚜렷이 구분이 된다는 건데....
이미 오천년 전에 나타나 이천년전에 막을 내린 이집트 문화가 있었는데, 한반도 지역은 이천년전이나 되어야 철기사용의 흔적이 발견되는 것이다.
고조선, 마한, 변한, 진한... 그렇다. 이미 그 이름부터가 철저히 한자화되어 있는 것이다. 조선인은 한반도나 요동반도, 만주일대 원주민들의 말로 남겨진 단체명이나 국가명조차 없는 것이다. 고조선이나 삼한을 구성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한반도 남부, 중부에 근거를 둔 입장에서 과연 독자적인 브론즈문화라도 가지고 있는 어떤 집단을 우리들의 모태로 연계시켜 볼 수 있다는 걸까?
지금 박물관에 전시된 부여 유물에서 부여가 옥 가공에 특화되었던 문화였다는 문헌연구성과를 짐작해 볼 만한 무엇이 있었는가? 일단 대단히 빈약하다는 걸 알아야 하는 것이다.
문헌연구로 볼 때 고구려와 백제는 명백하게 부여에서 기인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박물관의 빈약한 고구려 유물로 볼 때 부여에서 고구려로 이어지는 무엇을 느껴보거나, 부여에서 백제로 이어지는 무엇을 느껴보기는 힘들다고 봐야 할 것이다. 더군다나 고조선의 브론즈 유물과 마한 등 삼한에서 보이는 아이런의 유물을 연계시키는 것도 어렵다고 보인다. 물론 부여 유물들을 고조선과 연계시켜 보기도 어렵다.
그나마 고구려보다 백제유물이 풍부한 것과 이들보다 신라의 유물이 풍부한 점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걸까?
백제의 칼이나 가야의 칼이 무엇이 다른걸까?
철갑옷! 방탄복으로써 효용성이 있었을까? 철판조각의 양 끝에 구멍을 뚫어 가죽으로 이어붙였다. 대왕이란 글자를 써 넣은 흔적. 아예 철판을 이어붙여 몸통의 모양을 통째로 짜 맞추어낸 갑옷도 있었다는 건데!! 그 모형이 되는 나무통이 발굴되었다는 건가?
가야인의 알콜문화.
가야인에게 있어 말이 있고, 그 말을 먹일 곡물이 있고, 거기에 각 종 치장에까지 신경을 쓰던 부류의 내면세계엔 어떤 관심사, 가치관이 들어있었을까?
백제, 가야, 신라의 토기 모두 받침에 직사각형의 구멍을 뚫은 비슷한 양식이 보이고, 이런 유물속에서 백제와 고구려는 부여의 직계세력이고, 가야나 신라는 한반도 남부의 토착세력이 연합하여 철기세력을 받아들인 것이라는 인식, 역사물 독서로 얻은 인식을 반영시켜 볼 수 있을까? 없었다.
이런 전시물들을 보면서 고구려가 낙랑을 몰아내었다는 사실이나,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 백제와 가야의 분쟁, 백제와 신라와의 전쟁을 생각해 보면서 무언가 심화시켜 볼 수 있을까? 고구려 눈에 백제나 신라, 가야는 어떻게 보였을까? 이들은 무엇을 내걸고 전쟁을 실행했을까? 유물들을 보는 것으로는 우열을 가릴 수 없지 않은가? 특별한 무기?
가야문화는 불교의 영향이 없던 걸까? 옥을 사용하거나 정밀한 금 세공술, 가야에서 은팔찌가 발견된 건 새삼스럽게 보인다. 아랍문화의 유리잔, 글라스가 보이는 것을 보면 우리가 이제는 흔하게 사용하는 글라스 하나하나도 물질적으로는 영원할 수 있는 기반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이제 필요한건 무언가 의미를 담을 수 있는가에 있을 것이겠다. 즉, 이 시대를 살았던 흔적으로써 뒷 세대에 의해 인식되어 지려면 어떤 물건을 사용했느냐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가야서민의 생활상과 관련해서 물고기 뼈가 남아있는 그릇이 출토되어 있다. 물고기의 작은 뼈가 남아있는 것에서 영원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하고, 그 뼈 모양의 정밀함이 보여주는 섬세함에선 과연 인간의 인텔리전스로 다시 모방해서 재생시켜 낼 수 있을까 하는 놀라움을 주는 것이다. 물론 비둘기의 깃털 하나만 보아도 그 정교한 아름다움을 느껴보곤 한다. 생명은 신성이 작용했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라계 흙조각
이사지왕 尒斯智王 이란 새김이 허술하게 남아있는 칼.
조잡한 흙조각들. 자지와 젖을 빼놓지 않고 표현한 애들 찰흙놀이 같은 조그만 조각상들.
원숭이나 개미핥기는 어떻게 알았을까? 고양이는 고양이 같지가 않다.
망둥어, 게, 물개는 분명 해당 개체를 표현하려 한 조각들이었다. 조잡한 토우들이라고 하지만 사진으로 볼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신라인의 사실적인 표현력이 잘 전달되었다.
신라유물은 풍부한 토기유물로 시작된다. 작은 흙모형을 토기의 장식용으로 사용하여 붙여놓은 것도 신선하다. 백제, 가야의 토기에서는 보지 못한 모습이다. 이어 정교한 토기가 제작되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역시 룡에 대한 인식이 있었고, 큰칼집에 작은칼집도 함께 만들어 붙여 놓은 모습, 신라는 사소한 비문까지 남아있다고 봐야 하는 게 아닐까?
한자의 소리읽기를 이용해 우리말을 표현한 모습들.
신라의 비석이 잘 남아있는 듯 보이는 건, 우리가 고구려를 보지 못해서 일 가능성이 높다. 지금 눈에 보이는건 조잡한 수준인 것이고, 여기에 더해 마한, 변한, 진한이라는 구분도 우리가, 우리니까 억지로 끄집어 내 보려고 했던 노력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신라, 백제, 가야의 차이를 얘기하기에는 한반도가 너무 좁은게 아닐까? 고대인의 입장에서 봐도 말馬만 있었어도 한반도가 좁았으리라!!
가야문화에선 룡龍의 이미지 사용이 없었던 게 아닐까? 룡은 북방계 정신세계의 산물인가? 낙랑, 고구려, 신라계에서만 룡을 느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요령이나 만주지역에 대한 발굴성과를 가져오지 못하면서 고조선과 부여의 전시실을 만들려다 보니 이상한 결핍이 발생해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수막새의 무늬는 통일신라시대에 와서 좀 더 정교해 졌다고 할 수 있겠는가? 고조선의 브론즈 칼을 요령식과 한국식으로 구분하는 것은 뚜렷이 나타난다. 그 둘을 하나의 동일문화의 변형태라고 할 수 있는 건가?
고조선의 요령식 브론즈 칼이나 한국식 브론즈 칼이 고구려, 백제의 아이런 칼이나 그 중간에 삼한에서 출토된 아이런 칼의 원조라고 관찰할 수 있는 걸까? 아니라고 본다. 아니다. 하나의 사용집단이나 문화권이 바꿔 온 유물의 변천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조선이 한에 의해 정벌된 것 처럼, 마찬가지로 백제와 고구려가 당에 의해 정벌된 후에 한반도엔 확실하게 당의 힘을 배경으로 한 불교문화가 퍼져나간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의 브론즈문화는 그 자체로 끝이고 이후 삼한에서 보이는 아이런 무기류는 모두 각자 어떤 방식으로든 획득한 것이다. 이런 삼한 각자에서 보이는 철기류는 또한 백제, 고구려, 신라와도 별로 상관이 없는 것이다. 통일신라시대라고 보기 보다 당의 시대였다고 봐야 할 듯하다.
그렇다면 왜 백제는 당과의 전쟁을 선택한 걸까? 백제는 중국 대륙의 세력과 싸우는 길을 선택한 것도 아닌 것이다. 그냥 신라의 견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전란에 빠져들어 소진되어 버린 것이다. 백제가 남아있으면 안되겠는 신라 지도부의 판단으로 인해 신라에 의해 일차로 제거된 것이고, 이어 일본세력과의 연합군은 당에 의해 마저 토벌된 것이겠다.
정교해진 목간글자.
발해시대 유물이라고 사들였따는데 흙으로 빚은 부처상은 얼마나 줘야 했을까?
발해 유물의 특징! 치미! 기본적으로 거대하다. 크다. 황소의 뿔을 연상하게 한다. 발해역시 불교라는 꿈을 꾸고 있던 것이다. 룡대가리 같은 꿈을 꾸는 것과 부처라는 인간상을 꿈꾸는 것! 연꽃무늬를 즐기는 것!
발해 역시 유물이 태부족인 것이다.
고려!
아! 고려시대로 오면 완연하게 매끄럽고 고급스러운 청자가 사용되기 시작한다. 고려의 지배층은 대단이 귀족적인 의식을 가지고 살았을 것이고 토기가 청자화된 것이나 인쇄술이 발전하여 깨끗하게 필체를 남길 수 있었던 것등의 물질적인 기반이 그런 의식구조를 받쳐 주었다고 하겠다. 돌에 새기는 글씨체도 종이에 쓴 것처럼 깨끗해 졌다. 고려는 대단히 사치스럽게, 화려하고 고급스런 세상을 살려 했던 모습이 느껴진다.
하루에 이 이상은 집중해서 보기가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