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우탄을쏘다
상상으로 그린 누드화 2020.7.29
오랑우탄을쏘다
2020. 7. 29. 14:36
그림을 그리려 한다면,
점 하나를 설정해야 하는데,
그 점은 도화지 저 건너편 가상의 공간에 설정되게 마련이다.
이런 매카니즘이 일랙트로마그내틱스의 이미지매소드와 상통하는 것 같다.
도화지의 모든 선은 하나의 점을 근본으로 도출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풍경화에서의 원점은 무엇일까?
얼굴, 손, 도자기 같은 개체를 그릴 때는 원점이 무엇일까?
카매라가 만드는 점은 오직 한가지 방식인 것일 뿐이고,
반사되는 빛을 분석해서 자동으로 조절한다고 해도 같은 기준에서의 조절일 뿐이겠다.
눈으로 어떤 대상을 포착하게 되면,
그와 동시에 의식적인 차원에서 점이 하나 생성된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눈으로 들어오는 시각정보를 보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점을 생성해서 연결시킨 시각정보만을 우리가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면이라는 방법이 필요한 것이겠다.
의식이 놓친 시각정보를 마저 끌어낼 필요라고 하겠다.
마찬가지로 물리적인 분석 대상 역시 대상을 의식적으로 설정하는 동시에 점이 생성되는 것이다.
우리가 무한 평면 전하가 만들어 내는 어떤 지점에서의 필드스트랭스를 구하겠다고 했을 때,
무한평면전하가 의식적으로 설정되는 동시에 어차피 이를 가능하게 하는 의식속의 점이 발생해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겠다.
이런 관점이 바로 신자유주의를 낳은 것으로 경제학적으로 실물과 버블을 구분하지 않는 가치관이 태동한 이유인 것이다.
들뢰즈가 설파한 영화가 실물이라고 할 수 있다는 주장과도 맥락이 있다.
빛의 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영화가 실물이라고 해야 할 지 추상이라고만 해야 할지는 더 이상 무의미한다.
의식속에서 만들어 낸 이미지가 되었던,
물질계에 존재하는 실물이 되었던,
이들이 사람의 의식안에 들어와서 정립되려면 어차피 의식적인 가상의 점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고,
이 가상의 점이 실물과 결합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실물과 버블을 구분하려 했던,
독일과 일본의 가치관이 짓눌려 있다고 하겠다.